- 1975년 문을 연 노부부의 식당, 화물차 기사도 뱃사람도 알음알음 찾던 항구 골목의 밥집 — 화려함 대신 반세기를 택한 맛
〈제주 노포 열전 ①〉 — 세월을 견딘 가게를 찾아가는 연재의 첫 글이다.
제주항을 등지고 일도2동 골목으로 접어들면, 걸음의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는 구간이 있다. 노란 외벽 위에 둥근 간판 하나가 조용히 걸려 있다. '태화식당'. 그 아래 나무 간판에는 '40년 전통'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지만, 이 집이 실제로 문을 연 것은 1975년 1월이다. 올해로 반세기를 넘겼으니, 간판은 세월을 다 따라잡지 못한 셈이다.

◆ 항구가 먹여 살린 밥집
태화식당의 첫 손님은 관광객이 아니라 항구의 노동자들이었다. 화물차 운전사들이 제주항을 드나들며 끼니를 때우던 자리, 항운노조 조합원과 뱃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던 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화려한 상차림이 필요 없던 손님들이었다.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밥 한 공기면 충분했다.

한라일보 보도(2015년)에 따르면 산지천 인근 탐라광장 조성사업으로 원래 자리를 내주고 지금의 골목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자리는 바뀌었어도 부부의 손맛과 단골의 발길은 그대로 옮겨졌다. 벽에는 그 시절 기사 스크랩과 사업자등록증, 영업신고증이 나란히 붙어 있어, 지나온 시간의 두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주방에서는 안주인이 말없이 손을 움직인다. 메뉴판은 요란하지 않다. 문 앞 유리에 적힌 글자만 봐도 이 집의 성격이 드러난다. 김치찌개, 된장뚝배기, 야채찌개, 제육볶음, 그리고 여름 한철 자리물회와 한치물회.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반세기 동안 같은 얼굴을 지켜온 메뉴들이다.
◆ 짙은 간장빛 오삼볶음, 집밥의 정석
이 집의 얼굴은 오삼볶음이다. 양파와 돼지고기, 오징어가 투박하게 볶여 나오는데, 양념빛부터 여느 제육볶음과 다르다. 고추기름 대신 깊은 간장 베이스를 쓰고, 그 위에 후추 향이 짙게 돈다. 접시에 담긴 색은 붉은빛이 아니라 진한 고동색에 가깝다.
맛의 순서도 다르다. 짠맛이 먼저 치고 나오는 대신 구수한 단맛이 먼저 온다. 씹을수록 어디선가 먹어본 듯한, 오래된 가정식 레시피의 기억이 겹쳐진다. 재료를 아끼지 않은 티가 나는 두툼한 고기와 오징어, 그리고 국내산 원료를 고집한다는 벽면 표기가 이 맛의 배경을 설명해 준다.
고추기름 대신 깊은 간장, 매운맛 대신 구수한 단맛 — 태화식당식 오삼볶음의 방식이다.

◆ 후추 도는 야채찌개, 미각보다 기억을 건드리는
야채찌개에는 두부, 당근, 대파, 콩나물 같은 재료가 아낌없이 들어간다. 한라일보 보도에 따르면 돼지 사골로 국물을 우려내는 것이 이 집 야채찌개의 별미라고 한다. 뼈에서 우러난 진한 육수에 계란을 풀어 넣고, 마지막으로 후추를 흩뿌린다.
국물은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다. 자극으로 승부하는 찌개가 아니라, 오래 끓인 시간으로 승부하는 찌개다. 이런 음식은 혀보다 기억을 먼저 건드린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밥상, 누군가에게는 타지에서 그리워하던 집밥의 맛일 것이다.

함께 나오는 밑반찬도 허투루 놓이지 않았다. 콩나물무침, 깍두기, 김치, 오징어무침, 어묵볶음까지 다섯 가지가 골고루 상에 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구성이지만, 하나하나 간이 맞고 손이 간 흔적이 뚜렷하다. 벽면 차림표 아래에는 쌀·배추·고추가루·돼지고기 모두 국내산이라는 표기가 붙어 있다. 반세기를 버틴 식당이 재료에서만큼은 타협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힌다.
◆ 정직한 가격표, 그리고 두 가지 아쉬움
벽에 걸린 차림표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김치찌개·된장뚝배기·야채찌개·생선지리가 각 10,000원, 매운탕 10,000원, 자리물회·한치물회가 각 15,000원, 제육볶음·오삼볶음이 2인분 기준 각 20,000원이다. 반세기 노포치고는 소박한, 그리고 정직한 가격이다.

다만 처음 찾는 이라면 염두에 둘 점이 두 가지 있다. 영업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여서, 저녁에 반주 한 잔 곁들인 식사를 기대했다면 시간이 맞지 않는다. 휴무는 매주 일요일이다. 또 좁은 골목 안이라 주차가 쉽지 않다. 항구 노동자들의 밥집으로 시작한 곳이니, 애초에 저녁 장사나 넓은 주차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 반세기 뒤에도 남는 것
화려하지 않은 상차림이, 지금은 오히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함이 되었다. 유행하는 메뉴를 좇지 않고, 매일 같은 방식으로 국물을 우리고 반찬을 무쳐온 시간이 쌓여 지금의 태화식당이 되었다. 다 비운 그릇 옆에 제주 막걸리 한 병을 놓고 보면, 이 집이 반세기 동안 무엇을 지켜 왔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항구를 드나들던 화물차 기사와 뱃사람들의 자리는, 이제 그 골목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의 자리로 남아 있다.
BEST 뉴스
-
제주 노형동 "소인커피"...호주식 커피와 수제 디저트의 만남
탐라뉴스 · 현장취재 제주 노형동 골목에서 만난 커피의 여유…소인커피, 호주 멜버른 감성으로 눈길 호주식 커피와 수제 디저트의 조화…다양한 메뉴와 밝은 분위기로 즐기는 카페의 여유 제주시 노형동에 자리한 소인커피(Soin Cof... -
인제에 새로 오픈한 "태하숯불갈비" 다녀오다
인제에 갈비집이 새로 오픈하였다. 숯불갈비와 냉면 무료라고 써진 환한 간판이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끌게 만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매장은 그리 넓지 않지만 4인석 테이블이 꽉 채워져 있었다. 메인 메뉴는 ... -
제주시청 밤거리의 오래된 온기, 30년 이어온 닭고기·떡꼬치 전문점
허름한 간판, 그 너머로 번지는 구수한 향기 노포의 느낌을 가득 담은 허름한 간판에는 '베리굿'이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붉은색과 흰색 줄무늬 차양과 그 아래 놓인 메뉴판은 여전히 밤새 꺼지지 않는 활기를 담고 있다. 늦은 밤, 출출함을 채우려 모여든 사람들... -
제주 양식 맛집 찾는다면? 구남동 ‘루딕(ludic)’
제주시 구남동에 자리한 양식 레스토랑 '루딕(ludic)'을 찾았다. 피자와 파스타를 비롯해 리조또, 샐러드 등 다양한 메뉴를 갖춘 곳으로, 점심 식사부터 저녁 식사, 데이트와 모임 장소로 좋은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루딕은 제주시 구남동2길에 위치한 매장으로, 외관부터 일반적인 식당보다는 감각... -
밤하늘을 밝히는 감성 공간, '해동 별한곳'을 가다
해동(海東): 비취빛 물결이 영롱하게 이는 바다 마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의 호젓한 바닷가 골목, 동남아 휴양지의 한가로운 밤을 떠올리게 하는 이국적이면서도 다정한 감성 아지트 '해동별한곳'을 찾았다. 어두운 밤거리를 걷다 보면 따뜻한 빛으로 발길을 사로... -
“이 계절엔 삼치회”…제주 일도촌 찾았더니 손님들이 찾는 이유 있었다
제주에서 회를 떠올리면 광어와 참돔, 고등어회 등을 먼저 생각하기 쉽지만, 제철을 맞은 삼치 역시 제주 바다에서 만날 수 있는 별미다. 일도동에서 삼치 맛집으로 인기가 있었던 일도촌 본점이 자리를 옮겨 그 근처 2호점 자리에 최근 오픈하였다. 매장 내...

